10월, 2023의 게시물 표시

성모님과 순교자의 삶

이미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십자가의 길인 순교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삶이다. 그리고 십자가 곁을 지키셨던 성모 마리아의 전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더욱 다가서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의 길을 따르는 이들이 모두 '마리아의 아들'(요한19,26참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의 어머니, 구원의 어머니인 성모님에게 온전히 봉헌하고 의탁하는 영성 생활은 고난의 시대를 건너야 하는 우리 선조 순교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은총의 계획 안에 있는 이러한 마리아의 모성은 주님 탄생의 예고에 믿음으로 동의하시고 십자가 밑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간직하셨던 그 동의에서부터 모든 뽑힌 이들의 영원한 완성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속된다. 실제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이 구원 임무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어 당신의 수많은 전구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 주신다. 당신의 모성애로 아직도 나그넷길을 걸으며 위험과 고통을 겪고 있는 당신 아드님의 형제들을 돌보시며 행복한 고향으로 이끌어 주신다. 그 때문에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교회 안에서 변호자, 원조자, 협조자, 중개자라는 칭호로 불리신다."(<교회 헌장>, 62항) 한국 천주교회에 성모 신심이 깊게 뿌리내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교회에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순교자의 모후'이시기 때문에, 마음 깊이 성모 신심을 지닌 채 그분의 위로와 보살핌을 청할 때 우리 선조들은 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성모님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듯이, 어느 순간에도 우리의 "변호자, 원조자, 협조자, 중개자"이시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에 레지오 마리애 활동이 크게 활성화된 것도 같은 이유다. 우리는 박해를 견뎌내며 성모 신심을 지켰다. 순교자들은 묵주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기도하는

순교와 선교

이미지
  죽음보다 강한 믿음과 사랑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황일광 시몬 복자는 천민 중에서도 가장 천대받던 백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하길 즐겨 했다.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스 시인인 콘스탄틴 카바피도 <이타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요한 것은 여행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이는 비록 고단하고 오랜 여정일지라도 길 위에서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한국의 순교자들은 천당을 죽은 다음에 도달할 여정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이뤄지는 곳으로 여겼다. 그것은 파스카의 여정으로, 부활의 신앙으로 현세를 살아가는 힘이었다. 황일광의 천당도 그러했다. 황일광은 나라가 버젓이 금지하는 천주교를 믿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신앙의 진리를 따라 목숨을 내놓았다. "만 번 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겠으니, 저를 마음대로 하십시오." 황일광 복자뿐만 아니라 박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게다가 선교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박해를 받는 시대에 선교란 인간 구원에 대한 사랑과 목숨을 건 헌신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헌신적인 삶과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고문하던 관리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였다.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 속에는 매우 특이한 사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신자들을 죄수로 삼아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가했던 포도대장이나 관장, 포졸, 옥리들이 죄수인 순교자들에게 감복하여, 관직을 그만두거나 신자가 된 경우가 많다. 우리 선조 순교자들은 선교사들을 도와 사목, 성경 해설, 교리 등을 다 맡아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순교자들은 체포되고 난 후에도 관장의 심문대나 고문대 앞에서까지 포교 활동을 하였다. 그들이 관장 앞에서 변론한 교리 해설을 통해

나자렛 성가정 영성과 순교 영성

  나자렛 성가정 영성 나자렛 성가정 영성도 역시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 다시 말해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고 그분과 같아지려고 노력하는 영성이다. 이 영성 안에는 강생과 순례, 파스카적이고 예언적인 차원이라는 다양한 측면이 있다. 먼저, 나자렛 성가정 영성의 핵심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데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생의 교리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사회생활에서 강생의 의미를 귀담아듣고 실천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도전 가운데 하나는 선교 강박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선교 강박증이란 내가 믿고 변화되기 전에 선교를 먼저 생각하는 조급증을 뜻한다. 이는 교세를 키워야 한다는 성장주의적 교회관의 폐해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선교하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선교의 출발점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시대의 징표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인간의 역사와 사회 안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하지만 이 세상은 하느님의 모습을 찾기는커녕 그분의 말씀을 듣기에도 너무나 소란스럽다. 침묵과 고요 안에서 성찰하고 기도할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 모두가  물질만능, 인간성 상실이라는 수렁에 빠져 있으며, 하느님의 자리는 자본, 즉 돈이 차지했다. 강생의 영성은 시대와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려는 신앙적인 통찰이다. 우리 신앙 선조들에게 들렸던 하느님의 음성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계급 사회와는 결이 달랐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따르며, 역사와 세상 안에서 목숨을 담보로 한 믿음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순례의 영성, 파스카의 여정에서는 하느님의 나라로 함께 걸어가는 동반과 배려의 의미가 부각된다. 그 동반과 배려의 의미는 '성가정'이라고 불리는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들 예수님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 요셉과 마리아는 부모로서 무한한 배려와 관심으로 아들 예수님의 길을 지켜 주었고, 마리아는 마침내 아들의 처참한 죽음을 눈앞에서 보게

교우촌

이미지
  초대 교회의 표양을 따른 자발적 신앙 공동체 교회사가들은 전국적인 박해가 일어났던 신유박해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박해가 교우촌을 이루는 배경이 된 셈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형성된 교우촌의 모습에는 초대 교회의 모습이 엿보인다. 당시 교우들의 상황을 전해 주는 서신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천주교 쪽으로 돌아서서 정의를 찾는 사람들은 가난과 곤궁에 찍어 눌려지고 아무 재원이 없는 사람들 중에 있습니다. 부유하던 교우들은 가난하게 되었고 가난한 교우들은 동냥질을 하고 의지할 데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어 목숨을 이어나가기에도 천하에 없는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교우들이 원망을 하거나 불평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천주교를 봉행하기 위해 떠돌아다니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박해를 피하기 위해 모인 교우촌은 그 안에서 교회의 이상적 모델이기도 한 소공동체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였다. 깊은 산골에 흩어진 교우촌은 촌락에 사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었고, 교회 활동의 근거지 역할을 했다. 이런 까닭에 교우촌은 선교와 순교의 못자리가 될 수 있었다. 전국 각지로 퍼진 신앙의 못자리 신유박해라는 엄청난 참극을 겪은 뒤 교우촌은 전국 각지에 형성되었다. 조정의 박해로 인해 신앙인들이 고향을 등지고 전국 각지로 흩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전국에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가톨릭 신앙이 확대된 측면도 있다. 전국적으로 퍼진 교우촌은 신앙 선조들이 자발적이며 헌신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이룬 곳으로, 가톨릭 신앙이 지역에 뿌리내리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이는 가히 강생의 영성 공동체의 모태였다고 할 수 있다. 사제가 없던 시절, 교우촌을 중심으로 한 선교활동과 엄격한 교리 교육은 박해받는 교회의 재건에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교우촌이라는 곳에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생활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성화되면서 교우촌은 선교하는 공동체의 모범이 되었다.

안중근 토마스 의사

이미지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 안중근 토마스 의사(1879년~1910년)는 박해 시대의 순교자들 못지 않은 인물이다.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선교 순교자들의 영성이 신앙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했다. 이는 그가 민족애와 깊은 신앙심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며,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조국을 구하고자 하는 염원을 갖고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행동이지만 그는 모든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천주교 신자의 독립 운동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안중근 의사는 살인자로 매도되어 성사도 받지 못했고, 빌렘 신부와 면회하는 일도 방해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는 사형되기 전 자신의 장남인 분도를 사제로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남길 만큼 신앙심이 돈독했다. 뮈텔 주교는 안중근 의사를 외면했지만,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신앙으로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그동안 한국 교회사에서 외면 받아왔다. 그가 가톨릭 신자로 복권된 것도 서거 100주기인 2010년에 와서야 이루어진 일이다. 안중근 의사 조선을 넘어 동양 평화를 향해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삶과 그가 쓴 동양 평화론에서 그가 역사와 민족 앞에 밝힌 신앙 고백과 민족애, 그리고 세계 평화에 대한 뚜렷한 신념을 읽을 수 있다. 안중근 의사는 예언자적 통찰을 지니고 있었고, 민중과 민족을 사랑하는 깊은 신앙심과 민족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역사성 없는 신앙 의식을 보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는 자신부터 먼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교육 운동과 국채 보상 운동과 같은 계몽 운동에 나섰고, 이는 더 나아가 의병 활동까지 이어졌다. 그의 신앙은 단지 성당 울타리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역사 현장과 마주하였다. 또한 민중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여 자신의 신앙을 증거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이미지
조선 땅에 자신의 피를 봉헌하다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년) 신부는 지금의 당진인 충남 내포 솔뫼에서 태어났다. 그는 증조부부터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순교한 집안 출신이었는데,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나서 파리 외방 전교회는 방인 성직자를 양성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 방침에 따라 피에르 모방 신부는 김대건과 최양업,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그들을 마카오 신학교에 보냈다. 소년 김대건은 그 때 이미 "앞으로 조선 교회를 위해 몸 바치겠다."라는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김 신부는 우여곡절 끝에 1845년 8월17일, 만 24세 떄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에 의해 상하이 푸동 지역의 금가항(金家港)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일주일 뒤 조선인 첫 사제가 봉헌하는 첫 미사는 다블뤼 신부가 보좌를 했는데 집전 사제인 김대건 신부, 그리고 그와 미사를 드렸던 다블뤼 신부 모두 훗날 조선 땅에서 자신의 피를 봉헌하고 삶을 마감한다. 1845년 10월,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배편으로 강경 나바위 교우촌으로 입국했다. 그들은 한양을 중심으로 수원과 용인 일대에서 비밀스러웠지만 열정적인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846년 6월, 김대건 신부는 만주에 머물고 있던 메스트로 신부의 입국을 돕기 위해 서해안 길을 개척하다가 백령도 근처 순위도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곧 해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다가 한양으로 이송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나는 광둥성 마카오에서 자랐으며, 천주교인입니다. 호기심과 내 종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자신의 신원을 알렸으나 교회나 다른 신자들에게 해가 갈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일찍이 서양 학문을 익히고 라틴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김대건 신부의 재능을 알아본 헌종 임금은 배교하면 그를 조정에서 중히 쓰겠다고 회유했지

황사영 알렉시오

이미지
반역의 지식인, 민족과 사회의 구원을 꿈꾸다 천주교에 비교적 온전한 정책을 펴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뒤 신유박해(1801년)가 일어났다.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년)는 이 과정을 냉철히 지켜보던 지식인이다. 황사영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는 16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천재다. 그러나 이후 그는 정약현의 사위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신자가 되었다. 그래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양을 떠나 제천에 있는 베론의 교우촌 토굴에 은거했다. 그의 이러한 은거생활은 8개월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는 토굴에 머물면서 지금 조선에서 일어나는 박해 상황을 보고 교회를 구해야겠다는 강렬한 염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1801년 10월에 이러한 염원을 적어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낼 계획을 세웠다. 이 서신은 길이 62cm, 너비 38cm의 흰 명주 비단에 검은 먹으로 한 줄에 110자씩 121행, 총 1만 3천3백여 자를 깨알같이 써 넣은 것으로, 말 그대로 비단에 쓴 백서였다. 하지만 이 서신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 문서로 인해 황사영은 조선이 망한 후에도 매국노이자 반역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황사영의 절박한 호소를 민족 국가라는 잣대로만 평가한 탓이다. 황사영이 백서에 제시한 우리나라의 난국 타개 방안은 크게 도득황지(圖得皇旨), 내복감호(內服監護), 양박청래(洋舶請來)로 이른바 삼조흉언(三條凶言)이다, 우선 도득황지란, 무고한 백성인 천주교도들을 잡아 처형하는 조선 정부를 제어하도록 청나라 황제에게 종주권 행사를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둘째 내복감호란, 조선과 청나라 간 언어와 의복을 섞어 왕래를 편하게 하여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박청래란, 서양의 군사와 무기를 실은 큰 배가 와서 조선의 국왕이 선교사를 받아들이고 우호 조약을 맺어 신앙의 자유를 얻도록 강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사영의 백서는 입장에 따라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천

윤지충 바오로 복자

  신주를 태운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윤지충 바오로(1759~1791년)는 정약용의 외사촌으로 해남의 명문 양반가의 맏이였다. 그의 6대조는 조선 시대 문신이자 뛰어난 시조 작가로 널리 알려진 윤선도이며, 그의 증조부는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로 유명한 윤두서다. 총명한 인재였던 그는 1783년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윤지충은 천주교 교리에 심취해 있었다. 스스로 <천주실의>와 <칠극> 등 교리 서적을 구해 베껴 읽으며 천주교 알기에 매진한 것이다. 그리하여 1787년에는 서울에 와서 내종형인 정약전을 대부로 삼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은 물론,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었다. 나중에 함꼐 순교하게 되는 이종사촌 권상연 야고보도 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1790년 윤지충은 윤유일이 북경의 구베아 주교로부터 받아 온 사목 서한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신주를 불태우고 그 재를 집 뜰에 묻었다. 1791년 음력 5월 그의 어머니가 선종했을 떄도 윤지충은 상주로 에의를 갖춰 장사를 지내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위패를 만들지 않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으며, 음식도 차리지 않았다. 이는 어머니 권씨의 뜻이기도 했다. 사대부 명문가의 장남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폐제분주 사건은 당시 유교사회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조선 사회는 <주자가례>에 규정된 예법을 따랐는데, 이 예법의 핵심에 신주가 있었다. 따라서 신주를 불살라 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받을 수 없는 천인공노할 반동 행위였다. 이렇게 천륜을 어긴 죄인에 대한 소문은 결국 조정에까지 알려졌고, 유림은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조정에 이들의 처벌을 원하는 상소문이 올라왔고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한 체포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