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알렉시오

반역의 지식인, 민족과 사회의 구원을 꿈꾸다

천주교에 비교적 온전한 정책을 펴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뒤 신유박해(1801년)가 일어났다.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년)는 이 과정을 냉철히 지켜보던 지식인이다. 황사영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는 16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천재다. 그러나 이후 그는 정약현의 사위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신자가 되었다. 그래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양을 떠나 제천에 있는 베론의 교우촌 토굴에 은거했다. 그의 이러한 은거생활은 8개월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는 토굴에 머물면서 지금 조선에서 일어나는 박해 상황을 보고 교회를 구해야겠다는 강렬한 염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1801년 10월에 이러한 염원을 적어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낼 계획을 세웠다. 이 서신은 길이 62cm, 너비 38cm의 흰 명주 비단에 검은 먹으로 한 줄에 110자씩 121행, 총 1만 3천3백여 자를 깨알같이 써 넣은 것으로, 말 그대로 비단에 쓴 백서였다. 하지만 이 서신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 문서로 인해 황사영은 조선이 망한 후에도 매국노이자 반역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황사영의 절박한 호소를 민족 국가라는 잣대로만 평가한 탓이다.

황사영이 백서에 제시한 우리나라의 난국 타개 방안은 크게 도득황지(圖得皇旨), 내복감호(內服監護), 양박청래(洋舶請來)로 이른바 삼조흉언(三條凶言)이다, 우선 도득황지란, 무고한 백성인 천주교도들을 잡아 처형하는 조선 정부를 제어하도록 청나라 황제에게 종주권 행사를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둘째 내복감호란, 조선과 청나라 간 언어와 의복을 섞어 왕래를 편하게 하여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박청래란, 서양의 군사와 무기를 실은 큰 배가 와서 조선의 국왕이 선교사를 받아들이고 우호 조약을 맺어 신앙의 자유를 얻도록 강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사영의 백서는 입장에 따라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천주교의 입장에서 보면, 황사영 자신에게 세례를 주었던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인들이 순교하는 모습을 교구에 알리는 보고서이자 새로운 성직자를 보내 달라는 영입 청원서이지만,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는 외교 간섭을 통해 조선의 굴욕을 청원하는 매국과 반역의 문서인 셈이다. 그래서 이 백서를 본 조정은 "글자마다 흉악한 뱃심이고, 글귀마다 역적의 심장"이라며 분노했다.

황사영의 백서는 결국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황사영은 백서를 전달하고자 했던 밀사 황심 토마스, 옥천의 요한과 함께 잡혀 혹독한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 황사영은 대역 죄인으로, 먼저 목이 잘린 후 시신을 여섯 토막을 내는 육시형을 당했다. 그리고 황사영의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그의 부인이자 정약현의 딸인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 대정골로 유배를 갔다.



황사영의 백서



비단 위에 적은, 새 세상을 위한 간절함

오늘날로 치면 황사영은 양박청래의 원흉이고, 백서는 국가 전복을 기획한 문서다. 하지만 백서를 읽다 보면 임금마저 인정한 국가의 인재가 그리스도교라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신앙인으로서 믿음을 지키려고, 이 백서에 간절히 호소했다.

게다가 당시는 박해를 통해 인권이 유린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백서는 유신 독재 시절에 국가 폭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인권이 유린당했을 때 인권을 지키기 위해 국제 사회에 호소해야 했던 시민들의 경험과 일맥상통한다. 이 백서에는 보편적 인권이 무방비하게 짓밟히던 시대에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보편적 권위에 호소하려는 절박한 배경이 담겨 있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세기 조선은 박해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핍박받던 민중이 들고 일어나는 민란의 시대이기도 했다.  곧, 혁명과 반정을 꿈꾸고 실행에 옮기던 시대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황사영의 백서를 단지 신앙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만 보기보다 사회 구원과 민족 구원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신유박해 당시 죽음을 택한 이들 가운데는 반상의 신분 차별, 남녀 차별, 전제 군주제를 넘어서서 새로운 평등 세상을 꿈꾸던 이들이 많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황사영 역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시대는 황사영을 만고의 역적으로 낙인찍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그가 시복되는 것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2014년 124위 시복식에서 신유박해 순교자는 54위로 가장 많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만은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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