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영성의 회복

 항상 새로워져야 하는 교회

세계 교회사나 한국 교회사를 볼 때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순교자의 삶은 분명 특별한 은총이다. 순교 자체가 주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위대한 일이기 떄문이다.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비롯한 한국의 많은 순교자들은 봉건 사회의 질곡 속에서 주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모범을 보였다.

그들은 성직자 없이 한국 천주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서로를 교우라 부르며 계급 제도를 뛰어 넘어 교우애를 나눴다. 신분 질서가 확고했던 유교 사회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신처럼 떠받들던 신주도 치우고, 언문이라며 경시하던 한글로 교리서도 만들었다.

또한 박해 시대를 산 한국의 신앙인들은 일생을 두고 언제든지 순교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스스로 단련하지 않으면 언제든 꺾일 수 있다. 폭력과 억압에 언제든 좌절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순교자들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신앙을 그들의 일상에서 준비하였다. 순교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신앙이 불가능했기에 그들을 고문하던 관리들 앞에서도 당당하고 태연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순교자들은 연약한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무한한 자유를 꿈뀄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진산 사건'으로 알려진 윤지충의 폐제분주 사건은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의 양반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신주를 불사른 행동은 당시 지배 질서에 대한 저항과 조선 땅에 세울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간상을 위한 희생을 의미했다.

또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앞두고 여순 감옥을 찾아온 동생들에게 "사람은 반드시 한 번 죽는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지 않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다." 라며 자신의 생사관을 드러냈다. 안중근 의사의 평소 삶과 동양 평화를 저해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하던 당찬 용기는 다름 아닌 그의 자유롭고 초연한 신앙과 인생관에 있었다.

순교자들이 이렇게 자기를 투신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까닭은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현재로 살아 나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사는 일은 회개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지속적인 회개에서 찾는 것이다. 회개란 옛것에서 새것으로 돌아섬이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 떄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 8)

이러한 당당함이나 초연함이 없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워질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움을 발견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들은 버릴 수 없는 것들을 너무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비웃은 이들은 정녕 새로움에 마음 열기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신중함이라 말했다. 우리는 이들과 달리 나자렛 예수님을 따라 살면서 불의에 대한 도전을 피하지 않아야만 하느님 나라에 맞갖게 변화할 수 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꼐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도 교회도 모두 주님 안에서 항상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회개하는 삶

끊임없이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중요한 일이다.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것이 하느님을 향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라는 요한 세례자의 선언은 허튼소리가 아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삶, 그런 삶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다.

회개는 하늘에서 이룰 일이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이 땅에서 이룰 일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도 죽어서 하늘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황일광 복자의 말처럼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그곳에 갈 수 없다.

박해가 수그러들면서 한국 교회의 순교 신앙은 차츰 신자들의 생활 속으로 뿌리를 내렸다. 이렇게 순교 성인들의 신앙이 자양분이 되어 오늘의 한국 교회가 되었다. 따라서 순교자를 현양하는 길은 오늘날 내가 순교 영성으로 살아가는 일로 완성된다.

한편 순교 신앙은 꼭 목숨을 바치지 않더라도 그에 못지않은 믿음의 열정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활 속의 순교 영성'으로 발전했다. 피 흘리는 '적색 순교'가 아니더라도 매일 매 순간 하느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삶을 바치는 '백색 순교'도 있는 것이다.

백색 순교는 일상에서 나의 아집을 꺾고 타인을 위해 희생과 고통을 감수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이는 매일매일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나서는 신앙의 결단을 요구한다. 이 외에도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누는 일, 곧 욕망을 절제하는 일로 이룰 수 있는 '녹색 순교'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일생을 걸고 하느님의 진리와 신앙을 증거한 이들을 우리는 증거자라고 일컫는다. 예전에 우리는 매일 미사 경본에 성인들 뿐만 아니라 증거자들도 축일로 기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백색 순교'와 '녹색 순교'로 우리는 선조 순교자의 영성을 따르는 증거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집전한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식은 아비뇽 교황 시대를 제외하면 처음으로 로마 교황청 밖에서 거행된 시성식이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순교자의 나라이다. 이런 순교자의 나라에 사는 우리 신앙인들은 선조들의 모범적인 순교 영성을 더욱더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나와 교회가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하고 탐욕의 노예가 되어 헌신과 자애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마땅히 우리는 바로 우리 선조들의 순교 영성을 기억하여 그리로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우리 선조 순교자의 영성이야말로 한국 천주교회의 미래상이기도 한 것이다.




신앙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

우리 선조 순교자들은 마치 '씨 부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1-20 참조)에서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과 같이 말씀을 받아들여,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은 분들이다. 한국의 순교자들은 복음 말씀을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했으며, 그것이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지상에 구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형제적 사랑'을 박해 현장과 교우촌 등 현실의 삶에서 실천해 갔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1요한 2,5-6)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신자들도 선조 순교자와 같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부터 살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완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20세기를 빛낸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랑스의 장 다니엘루는 오늘날 대중은 믿음을 포기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러한 현대인의 불신 문화는 그들 자신이 무슨 죄악을 저지르는 지 잘 모르는 데서 유래했다고 본다.

그는 현대인이 하느님을 하나의 이상적인 존재, 즉 가까이 다가가기에 너무나 먼 유토피아로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 까닭에 현대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채무처럼 여긴다. 이 때문에 하느님을 날로 짐스럽고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다니엘루의 이러한 지적은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한국인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서도 점차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점차 옅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답은 '희생이 없는 종교'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말은 희생과 사랑의 십자가 없이 부활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잘못된 신앙인의 자세를 질타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와 참기쁨은 없고 희생과 고통만 있는 거 십자가가 판을 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진리가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자유자본주의와 온갖 물신 풍조, 이념편향적인 정치 이데올로기 등이 참된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는 희생 없는 종교라는 말과 맥이 닿아 있다. 이 세상의 슬픔에 함께 울어 주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랑의 영성이 뿌리내려 자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언젠가부터 '나만 잘 살면 그만.' 또는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라며 이웃은 물론 형제 자매에게도 소홀해지고 있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시되면서 하느님의 자리에 돈을 앉혀 놓고, 돈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있다. 이렇게 되자 자신만의 이익이 최상의 가치인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산다고 해도 그것이 영원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 길은 하느님께서 일러 주시는 인간의 길이 아니다. 우리 선조 순교자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며 하느님 나라, 하느님 백성의 영적 가치를 추구했다. 그래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으로 들어오시면 우리는 삶을 훌륭하게 만드는 그 어느 것도 잃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즘 시대는 신앙의 유산을 소홀히 하려는 유혹이 많다. 이에 대해 대구가톨릭대학교 윤리 신학 교수인 김정우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사회는 도덕성, 시민의식, 사회성, 정치, 가족 관계에서의 퇴폐성이 드러나고 있으며, 기교는 증가하나 양심은 무디어지고, 위안거리는 증대하나 인생의 의미는 사라져 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는 향상되나 도덕은 퇴보하고, 성은 넘치나 사랑은 줄어들고, 쾌락은 증가하나 기쁨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처벌을 앞두고 배를 만들고 있는 동안 이웃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했던 노아처럼, 종교와 신앙에 냉담하고, 신앙의 유산을 소홀히 하려는 유혹을 거슬러 이 시대에 진정한 종교와 신앙의 의미를 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처럼 완성되고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려면 절대적인 윤리 규범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절대적인 윤리 규범에 대해 도전과 비판이 앞서고 있다. 우주론적으로 생각해 보면 절대적 윤리 규범을 버리고 개인을 역사적 중심으로 생각하며 자신을 극대화하려는 사고는 극단적 이기주의와 심각한 가치 전도를 불러일으킨다. 결국 나에게 맞으면 선이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악이 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이 같은 허상과 망상에 맞서야만 한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라는 책에서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라고 지적하였다. 교회 역시 성장 위주의 교회 정책과 세속화로 우리 신앙생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이중적 신앙생활로 치닫고 있다. 경색된 영혼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영성을 다시 찾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의 아드님의 탄생을 깊이 경험하고 체험해야 한다.

독일의 신비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예수님이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사건을 하느님 아드님의 탄생과 관련시켜 말한 적이 있다. 에크카르트는 이 사건에서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후, 군중 가운데에서 찾지 못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았다는 부분에 영적 의미를 부여한다. 즉 우리가 하느님의 탄생을 경험하려면 군중을 떠나 우리가 본래 왔던 근원과 근저로 돌아가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대 역시 이 숭고한 탄생을 발견하기 원한다면 모든 '군중'을 떠나 그대가 왔던 근원과 근저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모든 영혼의 기능들과 그 활동들, 이 모든 것이 '군중'이다. 기억, 이성, 의지는 모두 그대를 잡다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들을 모두 떠나야 한다. 감각들과 상상력의 활동, 그리고 그대가 만나거나 안중에 두고 있는 모든 것들 말이다. 그때야 비로소 그대는 탄생을 얻을 것이며 그러지 않고서는 단연코 그것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탄생은 친구들이나 친척들이나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오히려 아주 그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에크하르트는 영혼을 '잡다하게 만드는' 모든 것에서 벗어날 때 하느님의 아드님의 탄생을 체험할 수 있다고 안내하는 것이다. 우리 순교자들의 영성은 에크하르트의 말처럼 채워졌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커다란 열매를 맺은 것이다. 자본의 노예가 되어 신앙의 활력을 잃어 가고 있는 오늘날, 하느님께서 지어내신 온 우주의 생명과 인간을 경시하는 오늘날에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신앙유산은 참으로 아름다운 선물이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한국 교회의 위대한 유산인 우리 순고자들의 순교 영성이 이 혼탁한 세상을 맑게 해 줄 향기로운 변화의 꽃으로 피어나기를 기도한다. 오늘날 순교 영성을 올바르게 알고, 선조 순교자들처럼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신앙생활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삶을 살 때 우리 선조 순교자들의 순교 영성을 우리 자손들에게 위대한 신앙 유산으로 물려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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