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적 영성과 강생의 영성

    



 영성이란 넓은 의미로 본다면 인간의 정신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인의 삶과 공동체 활동의 내적 원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삶의 원천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 안에서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삶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영성은 실천적인 면에서 종말론적 영성과 강생의 영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한다.



종말론적 영성

종말론적인 영성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을 죄와 고통의 장소로 보고, 인간의 구원과 성화(聖化)는 천상적이고 종말론적인 면으로 여기는 영성이다. 따라서 이 영성에서는 초탈, 침묵, 관상, 자기 성화, 완덕 등을 강조한다. 이런 뜻에서 종말론적인 영성은 '그리스도 파스카 신비의 죽음에 참여하도록 권고하는 영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성은 자기 포기, 자기희생, 고행, 고신극기 등을 강조하는 영성이기에 교회의 영성 가운데 보수적이고 전통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관상 수도회를 비롯한 여러 수도회에서는 이 종말론적인 영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모진 박해를 인내하고 자신의 목숨을 통해 신앙을 지켜낸 순교자들의 열렬한 신앙은 종말론적 영성의 모범이다. 한국 땅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종말론적 영성에 근거한 순교자들의 신앙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박해 속에서도 현세의 고난과 불의를 넘어 천상의 영광을 향하는 '파스카의 신비'를 보았다.

구약의 탈출기에 등장하는 '파스카'란 '건너가다. 무사히 이주하여 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구원의 상징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신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파스카의 신비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순교자들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 집으로 옮겨가 영원한 삶을 산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첫 번째 탄생인 한정된 생명에서 두 번쨰 탄생인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 신비를 모범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다. 이는 바로 종말론적 영성을 자신의 신앙 안에서 확인한 것이다. 신앙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본받는 것으로,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세상을 넘어서고자 하는 종말론적 영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순교자들의 위대한 신앙은 피 흘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부활을 증거한 신앙이다.





강생의 영성

강생의 영성은 '그리스도 파스카 신비의 완성인 부활에 참여'하는 영성이다. 강생의 영성은 그리스도 강생 신비의 완성인 부활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기에 사랑, 봉사 활동, 헌신, 하느님의 정의 구현, 노동의 가치 등을 신앙 안에서 실천하도록 강조한다. 결국 이 영성은 현세적인 면에서 진보적이고 행동적이다.

강생의 영성은 그리스도께서 인간 세상에 오신 것에 중점을 두는 영성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이 세상, 그분으로 인해 거룩해진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완성하려는 영성이다. 강생의 영성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어려움과 즐거움, 슬픔과 기쁨 등 모든 것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일치시키려 한다. 따라서 이 영성은 성과 속, 지상과 천상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거부하며, 세상의 것을 업신여기지 않고 올바르게 보고 판단하여 이 세상의 성화를 추구한다. 즉, 강생의 영성은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려는 영성이다.

한국의 선조 순교자들은 조선 후기 계급 차별, 인간 차별의 뿌리인 반상 제도班常制度를 넘어 하느님의 자녀로 서로를 바라보며 형제자매의 사랑을 나누었다. 서로 환대하며 우애를 나누는 이 사랑의 공동체에서 우리는 강생의 영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철저히 계급적 차별로 나뉜 신분 사회였음에도 현실에 굴하지 않고 같은 인간을 하느님의 동등한 자녀로 인정하며, 굴종과 예속을 넘어선 것이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갑과 을의 위계 질서를 넘어서 강생의 영성을 통해 이러한 신분 계층을 과감히 뛰어넘은 것이다. 가난하고 낮은 신분이라 할지라도 모두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로 여기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일치한 공동체는 참으로 우애의 공동체였다. 한국의 선조 순교자들은 자신의 것만 챙기지 않고 남의 것을 돌보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지녔던 것이다.



종말과 강생의 삶을 사는 순교 시대의 영성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삶을 따라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내리사랑'으로 이 새상을 살아가야 한다.

우리 선조 신앙인들은 종말론적 영성으로 천상의 것을 향하면서도,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강생의 영성으로 신분 차별을 넘어서 모두가 하나 되는 대동大同세상을 실천하고자 했다. 즉, 우리 선조 순교자들은 종말론적 영성과 강생의 영성을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이 둘을 종합적으로 잘 조화시켜 신앙생활을 한 것이다.

종말론적 영성과 강생의 영성을 합한다면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는 영성'이라고 한다. 이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실생활에서 체험하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한 그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는 영성을 따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그래서 참신앙인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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