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충 바오로 복자

 

신주를 태운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윤지충 바오로(1759~1791년)는 정약용의 외사촌으로 해남의 명문 양반가의 맏이였다. 그의 6대조는 조선 시대 문신이자 뛰어난 시조 작가로 널리 알려진 윤선도이며, 그의 증조부는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로 유명한 윤두서다. 총명한 인재였던 그는 1783년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윤지충은 천주교 교리에 심취해 있었다. 스스로 <천주실의>와 <칠극> 등 교리 서적을 구해 베껴 읽으며 천주교 알기에 매진한 것이다.

그리하여 1787년에는 서울에 와서 내종형인 정약전을 대부로 삼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은 물론,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었다. 나중에 함꼐 순교하게 되는 이종사촌 권상연 야고보도 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1790년 윤지충은 윤유일이 북경의 구베아 주교로부터 받아 온 사목 서한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신주를 불태우고 그 재를 집 뜰에 묻었다. 1791년 음력 5월 그의 어머니가 선종했을 떄도 윤지충은 상주로 에의를 갖춰 장사를 지내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위패를 만들지 않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으며, 음식도 차리지 않았다. 이는 어머니 권씨의 뜻이기도 했다. 사대부 명문가의 장남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폐제분주 사건은 당시 유교사회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조선 사회는 <주자가례>에 규정된 예법을 따랐는데, 이 예법의 핵심에 신주가 있었다. 따라서 신주를 불살라 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받을 수 없는 천인공노할 반동 행위였다.

이렇게 천륜을 어긴 죄인에 대한 소문은 결국 조정에까지 알려졌고, 유림은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조정에 이들의 처벌을 원하는 상소문이 올라왔고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이에 윤지충과 권상연은 충청도 광천과 한산으로 저마다 피했다가 숙부가 볼모로 잡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진산 관아에 자수한다. 윤지충을 잡아들인 진산 군수는 그를 협박하며 회유하려 애썼지만, 그는 오히려 천주교 교리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였다. 더 이상 윤지충의 신념을 굽히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진산 군수는 권상연과 함께 윤지충을 전주 감영으로 이송했다. 그들은 여기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또한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결코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윤지충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하였기에, 전라 감사가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한 형벌을 명령할 정도였다. 전라 감사가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은 짐승보다 못한 짓이며, 국가에 대항하는 역모와도 같다고 했을 때, 윤지충과 권상연은 그들의 신앙이 당시 조선이라는 국가와 양립할 수 없음을 알았다. 윤지충은 문초를 하던 감사에게 교리서를 읽어 주며 "천주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며 천지와 인간, 만물의 조물주"이기에, "사람의 살과 피는 부모에게서 받았으나 사실 이것을 주는 이는 천주"라면서 "충성의 뿌리도, 효도의 뿌리도 다 천주의 명령"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한 채,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면서 고문에 응하였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형문을 당할 때, 하나하나 따지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

정조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극형에 처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반대파의 상소가 30건 이상 올라왔고, 이를 빌미로 노론 벽파가 뭉쳐 남인을 공격하기 시작했기에, 체제공마저도 정조에게 사형을 건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조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참수한 뒤 5일간 현수하고 사학인 천주교를 철저히 엄계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형은 즉시 집행되었다. 그러나 윤지충과 권상연은 형장에 끌려가는 길에도 마치 잔치에 가는 사람들처럼 즐거운 얼굴로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전했다고 한다. 1791년 12월 8일(음 11월 13일)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를 당했을 때 윤지충의 나이는 33세였고, 권상연은 41세였다. 이렇게 하여 윤지충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오고 가는 사람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그들의 시신은 9일간이나 그 자리에 방치되었는데, 이 시신들은 조금도 썩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을 고문했던 형구에 묻은 피도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했다. 교우들은 손수건 여러 장에 순교자의 피를 적셨으며, 그중 몇 조각을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죽어 가던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이 손수건을 만지고 병이 낫기도 했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지 4년 후, 주문모 신부는 풍납문 앞을 지나면서 "성교를 공부하여 성인품에 이르게 된다면, 마땅히 두 사람의 무덤 위에 천주당을 세워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대로 120여 년이 흐른 뒤 바로 그 자리에 아름다운 전동 성당이 들어섰다.



나는 무엇을 태워 버릴 수 있는가

윤지충의 폐제분주 사건은 당시 조선 사회에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몇 가지 점을 되새길 만하다.

첫 번째로 주목할 점은 윤지충의 폐제분주 사건으로 신흥 세력과 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한 당파 세력이 충돌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윤지충은 천주교를 접하고, 거기서 새로운 신앙을 얻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서 천지만물의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제사를 금지하는 명을 따른 것이다.

순교자들은 구체제를 넘어 하늘 아래 모두가 형제자매인 평등 세상을 꿈꿨다. 그리고 임금보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 내리는 명을 따르려 했다.

그러나 이것이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천주의 명이 충성과 효도의 뿌리이기에 더욱 중시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론 벽파는 이런 그를 극형에 처하라고 계속 상소를 올렸다. 그들에게는 윤지충의 불효는 중요했지만 사실 더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윤지충의 신념을 핑계로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당쟁에 이용하기 위해서 그들은 윤지충의 신주 소각 사건을 체제를 흔드는 반사회적 패륜 행위이자 반역 행위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하느님의 명에 충실하고자 했던 천주교인들은 박해자들과는 달리 세상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 박해가 일어날 때면 산속으로 피신하여 신앙을 지키거나, 전교를  하다 발각되면 순순히 순교를 받아들이며 신앙을 증거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주목할 점은 윤지충이 바로 지배 계급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한국 천주교회가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퍼지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천주교를 받아들인 지배 계층 지식인인 윤지충이 과감히 지배 이념에 반기를 들고 신주를 불태우면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곧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들과 단절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는 그 일이 윤지충에게는 페제분주였다.

물론 오늘날에는 제사를 금지하는 일에 대해 당시와 다르게 가르친다. 교회는 더 이상 조상 제사를 우상 숭배나 미신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는 사회, 문화적 풍속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지충의 행위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또 다른 신앙의 길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국문학과 정병설 교수는 조선 후기의 순교자를 두고 "예전의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간형"이라고 묘사한다. 그렇다면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은 바로 '새로운 인간형의 선구'라 할 수 있다. 그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벌인 인간형이다. 윤지충은 당시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교 사상을 버리고, 신분이 보장된 양반 가문까지 버렸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마음 깊은 곳에 내면화된 신주 단지를 불태울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얻었다. 따라서 그는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자기 포기'와 '비움'의 영성이 어떠해야 한는지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를 버리고 신주를 불사른 신앙의 선조들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혹시 윤지충이 불사른 신주가 내 안에 내면화되어 있지 않은지 말이다. 그리고 내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나의 신주 단지가 도대체 무엇인지도 성찰해 보아야 한다. 내 안의 왜곡된 가치를 버리지 못하고, 교회의 적폐를 과감히 잘라 내지 못할 때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이 아닌 또 다른 신주를 모시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윤지충의 폐제분주 사건과 순교는 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상징하는 바가 큰 사건이다. 윤지충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신주를 태우며 신앙을 증거했고, 그 후 그가 순교한 자리 위에는 성당이 세워졌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렇듯 자신의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용기와 죽음을 뛰어넘는 증거를 통해서 세워졌다.

오늘날 자본에 대한 탐욕은 세상은 물론 교회 안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인간성이 상실되어 생명을 우습게 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때 과연 우리가 태워야 할 신주는 무엇일까? 과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새롭게 세워야 할까? 물론 순교자들을 통해 이미 그 답은 제시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어떻게 자신의 삶에서 실천할 것인지는 우리 앞에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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