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촌

 







초대 교회의 표양을 따른 자발적 신앙 공동체

교회사가들은 전국적인 박해가 일어났던 신유박해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박해가 교우촌을 이루는 배경이 된 셈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형성된 교우촌의 모습에는 초대 교회의 모습이 엿보인다. 당시 교우들의 상황을 전해 주는 서신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천주교 쪽으로 돌아서서 정의를 찾는 사람들은 가난과 곤궁에 찍어 눌려지고 아무 재원이 없는 사람들 중에 있습니다. 부유하던 교우들은 가난하게 되었고 가난한 교우들은 동냥질을 하고 의지할 데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어 목숨을 이어나가기에도 천하에 없는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교우들이 원망을 하거나 불평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천주교를 봉행하기 위해 떠돌아다니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박해를 피하기 위해 모인 교우촌은 그 안에서 교회의 이상적 모델이기도 한 소공동체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였다. 깊은 산골에 흩어진 교우촌은 촌락에 사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었고, 교회 활동의 근거지 역할을 했다. 이런 까닭에 교우촌은 선교와 순교의 못자리가 될 수 있었다.



전국 각지로 퍼진 신앙의 못자리

신유박해라는 엄청난 참극을 겪은 뒤 교우촌은 전국 각지에 형성되었다. 조정의 박해로 인해 신앙인들이 고향을 등지고 전국 각지로 흩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전국에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가톨릭 신앙이 확대된 측면도 있다. 전국적으로 퍼진 교우촌은 신앙 선조들이 자발적이며 헌신적으로 교회 공동체를 이룬 곳으로, 가톨릭 신앙이 지역에 뿌리내리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이는 가히 강생의 영성 공동체의 모태였다고 할 수 있다.

사제가 없던 시절, 교우촌을 중심으로 한 선교활동과 엄격한 교리 교육은 박해받는 교회의 재건에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교우촌이라는 곳에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생활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성화되면서 교우촌은 선교하는 공동체의 모범이 되었다. 그곳은 봉건적 신분제와 남녀 차별이 없는, 하느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인식을 실현한 공동체였다. 

교우촌에 살았던 신앙 선조들은 비록 가진 것은 턱없이 부족하였지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함께 나누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르고, 형제적 우애를 이루며,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교우촌은 마치 수도원처럼 사랑과 헌신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현한 공동체였다. 비록 환난중에 있었지만, 이 작은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를 지상에서 사는 파스카 여정을 걸었던 것이다.

사랑은 하느님의 유전자다. 사람이 하느님을 가장 닮는 순간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하느님의 사랑의 유전자를 가진 존재는 모두 한 몸이고 한 공동체다. 이것이 '공동체의 세계관' 또는 '공동체의 영성'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완덕을 향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완덕을 이루는 길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그 사랑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교우촌에서 이를 해냈다. 향주삼덕인 믿음, 희망, 사랑의 덕행을 닦아 공동체가 한 몸인 것처럼  공동체 영성에 최선을 다하며 완덕을 닦은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바탕

교우촌의 신앙인들은 한 번의 성사를 받기 위해서 일생 동안 선교사를 기다렸으며, 단 한 번의 미사참례를 위해 수백 리를 걸어야만 했다. 그것도 한밤중에 비밀리에 해야만 했다. 신앙 선조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백성임을 이렇게 힘겹게 확인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았기에 비록 몇 년에 한 번 성사에 참여할 수 있었을 뿐이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교회사가인 보수엣은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살라고 선포하셨다. 하느님 나라를 사는 공동체를 나중에 교회하고 부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교회란 하느님 나라를 사는 공동체다."

우리의 선교 순교자들은 교우촌이라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기 시작했고, 그 여정을 순교로 마쳤다. 이렇게 지상의 하느님 나라에서 하늘에 있는 하느님 나라로 무사히 건너가는 파스카 여정, 곧 부활의 신앙을 살아갔다. 이러한 까닭에 '순교의 터전'이었던 교우촌은 박해 시대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 교회 재건의 활로가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가 본당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바로 이 교우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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