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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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땅에 자신의 피를 봉헌하다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년) 신부는 지금의 당진인 충남 내포 솔뫼에서 태어났다. 그는 증조부부터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순교한 집안 출신이었는데,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나서 파리 외방 전교회는 방인 성직자를 양성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 방침에 따라 피에르 모방 신부는 김대건과 최양업,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그들을 마카오 신학교에 보냈다. 소년 김대건은 그 때 이미 "앞으로 조선 교회를 위해 몸 바치겠다."라는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김 신부는 우여곡절 끝에 1845년 8월17일, 만 24세 떄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에 의해 상하이 푸동 지역의 금가항(金家港)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일주일 뒤 조선인 첫 사제가 봉헌하는 첫 미사는 다블뤼 신부가 보좌를 했는데 집전 사제인 김대건 신부, 그리고 그와 미사를 드렸던 다블뤼 신부 모두 훗날 조선 땅에서 자신의 피를 봉헌하고 삶을 마감한다. 1845년 10월,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배편으로 강경 나바위 교우촌으로 입국했다. 그들은 한양을 중심으로 수원과 용인 일대에서 비밀스러웠지만 열정적인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846년 6월, 김대건 신부는 만주에 머물고 있던 메스트로 신부의 입국을 돕기 위해 서해안 길을 개척하다가 백령도 근처 순위도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곧 해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다가 한양으로 이송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나는 광둥성 마카오에서 자랐으며, 천주교인입니다. 호기심과 내 종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자신의 신원을 알렸으나 교회나 다른 신자들에게 해가 갈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일찍이 서양 학문을 익히고 라틴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김대건 신부의 재능을 알아본 헌종 임금은 배교하면 그를 조정에서 중히 쓰겠다고 회유했지

황사영 알렉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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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의 지식인, 민족과 사회의 구원을 꿈꾸다 천주교에 비교적 온전한 정책을 펴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뒤 신유박해(1801년)가 일어났다.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년)는 이 과정을 냉철히 지켜보던 지식인이다. 황사영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는 16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천재다. 그러나 이후 그는 정약현의 사위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신자가 되었다. 그래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양을 떠나 제천에 있는 베론의 교우촌 토굴에 은거했다. 그의 이러한 은거생활은 8개월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는 토굴에 머물면서 지금 조선에서 일어나는 박해 상황을 보고 교회를 구해야겠다는 강렬한 염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1801년 10월에 이러한 염원을 적어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낼 계획을 세웠다. 이 서신은 길이 62cm, 너비 38cm의 흰 명주 비단에 검은 먹으로 한 줄에 110자씩 121행, 총 1만 3천3백여 자를 깨알같이 써 넣은 것으로, 말 그대로 비단에 쓴 백서였다. 하지만 이 서신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 문서로 인해 황사영은 조선이 망한 후에도 매국노이자 반역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황사영의 절박한 호소를 민족 국가라는 잣대로만 평가한 탓이다. 황사영이 백서에 제시한 우리나라의 난국 타개 방안은 크게 도득황지(圖得皇旨), 내복감호(內服監護), 양박청래(洋舶請來)로 이른바 삼조흉언(三條凶言)이다, 우선 도득황지란, 무고한 백성인 천주교도들을 잡아 처형하는 조선 정부를 제어하도록 청나라 황제에게 종주권 행사를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둘째 내복감호란, 조선과 청나라 간 언어와 의복을 섞어 왕래를 편하게 하여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박청래란, 서양의 군사와 무기를 실은 큰 배가 와서 조선의 국왕이 선교사를 받아들이고 우호 조약을 맺어 신앙의 자유를 얻도록 강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사영의 백서는 입장에 따라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천

윤지충 바오로 복자

  신주를 태운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윤지충 바오로(1759~1791년)는 정약용의 외사촌으로 해남의 명문 양반가의 맏이였다. 그의 6대조는 조선 시대 문신이자 뛰어난 시조 작가로 널리 알려진 윤선도이며, 그의 증조부는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로 유명한 윤두서다. 총명한 인재였던 그는 1783년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윤지충은 천주교 교리에 심취해 있었다. 스스로 <천주실의>와 <칠극> 등 교리 서적을 구해 베껴 읽으며 천주교 알기에 매진한 것이다. 그리하여 1787년에는 서울에 와서 내종형인 정약전을 대부로 삼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은 물론,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었다. 나중에 함꼐 순교하게 되는 이종사촌 권상연 야고보도 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1790년 윤지충은 윤유일이 북경의 구베아 주교로부터 받아 온 사목 서한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신주를 불태우고 그 재를 집 뜰에 묻었다. 1791년 음력 5월 그의 어머니가 선종했을 떄도 윤지충은 상주로 에의를 갖춰 장사를 지내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위패를 만들지 않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으며, 음식도 차리지 않았다. 이는 어머니 권씨의 뜻이기도 했다. 사대부 명문가의 장남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폐제분주 사건은 당시 유교사회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조선 사회는 <주자가례>에 규정된 예법을 따랐는데, 이 예법의 핵심에 신주가 있었다. 따라서 신주를 불살라 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받을 수 없는 천인공노할 반동 행위였다. 이렇게 천륜을 어긴 죄인에 대한 소문은 결국 조정에까지 알려졌고, 유림은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조정에 이들의 처벌을 원하는 상소문이 올라왔고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한 체포령

한국의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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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장에서는 우리 선조 순교자들이 향주삼덕의 덕행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음을 살펴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그러한 삶을 살았던 우리 선조 순교자들의 신앙이 어떻게 뿌리내리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순교자인 윤지충, 황사영, 김대건, 안중근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려 한다. 이 네명의 순교자들를 뽑은 이유는 그들이야말로 새 세상을 위한 간절함이 깃든 순교자였기에 우리 순교자들의 영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범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보적 지식인들 의 천주교 수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조선인들은 무력한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껏 조선 왕조를 지탱하던 주자학이 아니라 다른 학문과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자신들이 오랑캐로 깔보던 청나라가 어느덧 명나라를 넘어 중화 문명이라는 바탕 위에 만주족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서양 문물까지 들여와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화려한 문명을 이루었다. 당시 북경을 오가던 사신들과 역관들은 새로운 사상을 담은 서책과 신식 물건들을 조선으로 가져오기 시작했고, 그중 <천주실의>, <칠극>, <직방외기> 등과 같은 천주교 서적도 함께 들어 있었다. 특히 박지원이나 박제가 같은 실학파는 오랑캐들에게는 배울 게 없다는 고정 관념을 깬 진보적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서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천주교를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받아들였지만 점차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실학파 중 한 사람인 이익은 <천주실의>를 읽으며, 그 책에 대한 발문을 썼는가 하면, 홍대용과 박지원은 사절단으로 북경을 방문했을 때 천주당을 찾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에 조선의 진보적 지식인들 중 점차 천주교를 학문을 넘어 하나의 종교로 믿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그중 이벽은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마침 북경으로 갈 일이 있던 이승훈을 설득하여 북경에서 기도문과 서적을 얻어

순교자들의 덕행

  천상의 기쁨을 향하는 향주삼덕 향주삼덕( 向主三德) , 이른바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덕행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우리가 실천해야 할 덕행이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향주삼덕을 몸소 살아가도록 강조해 왔고, 이는 우리 선조 순교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분들은 이 향주삼덕의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믿음 향주삼덕 중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 16,15-16) 이 말씀대로 우리는 구원에 대한 믿음으로 하느님 생명에 참여한다. 따라서 믿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드리는 응답인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분에게 희망을 두고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고 헌신하며 믿음을 키워나갈 때,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루카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열 명의 나병 환자를 치유하는 대목이 나온다. (루카 17,11-19참조)   그런데 치유된 열명 가운데 오직 한사람, 그것도 이방인으로 멸시받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주님께 응답하여 감사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이 사마리아인은 몸뿐만 아니라 소외받던 자신의 처지까지도 치유를 받았다. 그는 기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치유로 인해 더 크고 깊은 신앙의 눈을 열 수 있었다.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사회적 처지까지 치유된 후, 하느님의 현존과 자비에 대해 깊은 깨우침을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참된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 우리 선조 순교자들도 사마리아 사람처럼 믿음으로 주님께 응답하였고, 일상생활에서 믿음을 통해 기적을 체험했다. 그분들은 언제나 믿음에 감사드렸고,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삶을 살았으며, 죽음을 앞둔 형장에서도 자신의

종말론적 영성과 강생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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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성이란 넓은 의미로 본다면 인간의 정신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인의 삶과 공동체 활동의 내적 원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삶의 원천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 안에서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삶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교 영성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영성은 실천적인 면에서 종말론적 영성과 강생의 영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한다. 종말론적 영성 종말론적인 영성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을 죄와 고통의 장소로 보고, 인간의 구원과 성화 (聖化) 는 천상적이고 종말론적인 면으로 여기는 영성이다. 따라서 이 영성에서는 초탈, 침묵, 관상, 자기 성화, 완덕 등을 강조한다. 이런 뜻에서 종말론적인 영성은 '그리스도 파스카 신비의 죽음에 참여하도록 권고하는 영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영성은 자기 포기, 자기희생, 고행, 고신극기 등을 강조하는 영성이기에 교회의 영성 가운데 보수적이고 전통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관상 수도회를 비롯한 여러 수도회에서는 이 종말론적인 영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모진 박해를 인내하고 자신의 목숨을 통해 신앙을 지켜낸 순교자들의 열렬한 신앙은 종말론적 영성의 모범이다. 한국 땅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종말론적 영성에 근거한 순교자들의 신앙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박해 속에서도 현세의 고난과 불의를 넘어 천상의 영광을 향하는 '파스카의 신비'를 보았다. 구약의 탈출기에 등장하는 '파스카'란 '건너가다. 무사히 이주하여 가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는 구원의 상징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신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파스카의 신비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순교자는 어떤 분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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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완덕을 향하는 여정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그렇게 완전한 사람' (마태 5,48참조) 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처럼 완덕의 길로 나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신앙의 목적인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완덕을 닦아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을 증거하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뜻에로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처럼 낙원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뜻대로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완전한 응답이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언제나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뜻한다. 그것이 바로 완덕을 향하는 신앙생활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맡기면서 그분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실 수 있었다. 순교자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걸고 하느님의 진리와 자신의 신앙을 증거한 사람이다. 그렇게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내걸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읽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여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께 의지하며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었다. <한국가께 대한 사랑의 최고 표현이며, 가장 그리스도를 가까이 닮고 그분과 일치하는 방법이며 최고의 성성에 이르는 길"이다. 이 정의처럼 순교자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른 사람이다. 순교자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분이 몸소 보여 주신 십자가의 사랑의 모범을 따라 그대로 증거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순교를 그리스도를 따르는 최상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제자가 세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