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순교자들

 


앞 장에서는 우리 선조 순교자들이 향주삼덕의 덕행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음을 살펴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그러한 삶을 살았던 우리 선조 순교자들의 신앙이 어떻게 뿌리내리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순교자인 윤지충, 황사영, 김대건, 안중근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려 한다. 이 네명의 순교자들를 뽑은 이유는 그들이야말로 새 세상을 위한 간절함이 깃든 순교자였기에 우리 순교자들의 영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범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보적 지식인들의 천주교 수용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조선인들은 무력한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껏 조선 왕조를 지탱하던 주자학이 아니라 다른 학문과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자신들이 오랑캐로 깔보던 청나라가 어느덧 명나라를 넘어 중화 문명이라는 바탕 위에 만주족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서양 문물까지 들여와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화려한 문명을 이루었다.

당시 북경을 오가던 사신들과 역관들은 새로운 사상을 담은 서책과 신식 물건들을 조선으로 가져오기 시작했고, 그중 <천주실의>, <칠극>, <직방외기> 등과 같은 천주교 서적도 함께 들어 있었다. 특히 박지원이나 박제가 같은 실학파는 오랑캐들에게는 배울 게 없다는 고정 관념을 깬 진보적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서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천주교를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받아들였지만 점차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실학파 중 한 사람인 이익은 <천주실의>를 읽으며, 그 책에 대한 발문을 썼는가 하면, 홍대용과 박지원은 사절단으로 북경을 방문했을 때 천주당을 찾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에 조선의 진보적 지식인들 중 점차 천주교를 학문을 넘어 하나의 종교로 믿는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그중 이벽은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마침 북경으로 갈 일이 있던 이승훈을 설득하여 북경에서 기도문과 서적을 얻어 오고 세례를 받도록 당부했다.

1784년 2월경 27세의 청년이었던 이승훈은 북경의 천주당에서 세례를 받는다. 프랑스 출신 예수회 사제인 그라몽 신부는 이승훈에게 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의미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붙여 주었다. 주위에서는 이승훈이 교리 공부가 부족하다고 만류했지만 그라몽 신부는 단 하나를 물었을 뿐이다.

"임금이 당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하면 어찌할 것입니까?"

이승훈은 이 물음에 신앙을 버리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노라고 단호히 대답했다. 조선의 천주교회는 이처럼 첫세례자부터 이미 순교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에 온 선교사들은 '조선은 순교자의 나라며, 하늘 문이 활짝 열린 곳'이라고 불렀다.




박해의 시작 : 당쟁에 이용당하다

천주교가 사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으로 이해되다가 서교라는 종교로 발전하자 박해가 시작되었다. 특히 당파 싸움에 빠진 세력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천주교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천주교가 정치적 논리에 휘말리게 된 셈이다.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는 천주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총애하던 사람 중 하나였던 정약용이 바로 천주교인이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정조 임금 때 영의정이던 채제공도 천주교에 관대했다. 남인의 거두였던 그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옹호했던 인물이기에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리고 그런 채제공의 며느리가 바로 정약용의 누이였다.

그러나 남인이 득세하자 그들을 깍아내리고자 하는 세력은 윤지충의 폐제분주사건을 계기로 유교를 지킨다는 벽사위정을 내세우며 조상 제사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삼았다. 정조는 이 문제를 확대시킬 마음이 없었기에 윤지충 사건의 확산을 막고 사태를 무마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정학이 밝아지면 사학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며 천주교를 묵인하던 채제공과 정조가 생을 마감하자 조선은 곧 노론 벽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남인 시파와 천주교인에게 핏빛 역사가 시작되었다.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1801년 정월 10일 사학을 금하는 교서를 발표한다. 당시 조선에서 천주교를 박해한 이유는 첫째, 당파 싸움에서 천주교를 빌미로 반대파를 몰아내기 위한 것이고 둘째, 아는 것이 오직 주자학인 이들에게 천주교의 가르침이이나 사상은 변괴, 곧 불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801년 2월말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 등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이 박해를 신유박해라고 하는데, 이 박해로 순교한 교우들은 3백여 명에 달했다. 이후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을 거치면서 조선의 신앙인들은 가히 인종 청소에 가까운 살해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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