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의 덕행

 천상의 기쁨을 향하는 향주삼덕

향주삼덕(向主三德), 이른바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덕행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우리가 실천해야 할 덕행이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향주삼덕을 몸소 살아가도록 강조해 왔고, 이는 우리 선조 순교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분들은 이 향주삼덕의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믿음

향주삼덕 중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이 말씀대로 우리는 구원에 대한 믿음으로 하느님 생명에 참여한다. 따라서 믿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드리는 응답인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분에게 희망을 두고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고 헌신하며 믿음을 키워나갈 때,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루카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열 명의 나병 환자를 치유하는 대목이 나온다.(루카 17,11-19참조)  그런데 치유된 열명 가운데 오직 한사람, 그것도 이방인으로 멸시받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주님께 응답하여 감사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래서 이 사마리아인은 몸뿐만 아니라 소외받던 자신의 처지까지도 치유를 받았다. 그는 기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치유로 인해 더 크고 깊은 신앙의 눈을 열 수 있었다.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사회적 처지까지 치유된 후, 하느님의 현존과 자비에 대해 깊은 깨우침을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참된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

우리 선조 순교자들도 사마리아 사람처럼 믿음으로 주님께 응답하였고, 일상생활에서 믿음을 통해 기적을 체험했다. 그분들은 언제나 믿음에 감사드렸고,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삶을 살았으며, 죽음을 앞둔 형장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희망

"희망이 없을 때 인간은 동물이 되고, 약속이 없을 때 인간은 야만이 된다."

이 말은 김은국의 소설 <순교자>에 등장하는 주인공 신 목사의 말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 순교자들은 성경에 나온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고 오직 그 희망으로 그 야만적이고 혹독한 박해를 극복했다. 이처럼 인간이 근원적으로 구원받으려면, 희망을 통해 하느님과 만나야 한다.

향주삼덕 가운데 "희망"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고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은총과 도움으로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덕이다. 바오로 사도는 희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약속해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히브 10,23)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티토 3,6-7)

신앙인은 누구나 하느님과 영원히 일치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 그것은 항상 깨어 있는 삶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신심이 그러했고, 리지외의 데례사 성녀의 신심도 그러했다. 성녀는 하느님을 위해 고통받고 싶은 열망과 죄인의 회개를 위해 헌신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으면서도 의연하게 교회의 마음 속에서 '사랑'이 되겠다고 했다. 성녀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것이라는 희망과 죽어서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하는 작은 열망으로 가득했다. '작은 길'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영성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순수해지려 했던 그녀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 말고는 그 어떤 다른 원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만이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사랑을 이루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하느님과 일치하는 영생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우리 선조 순교자들도 소화 데례사 성녀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이 작은 성녀처럼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부활 신앙을 절대적으로 희망하고 믿으며, 덕행을 닦아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삶, 즉 영생의 삶을 살았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7-19)

이처럼 부활에 대한 희망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우리 선조 순교자들은 이런 희망 속에서 주님과 함께하고자 했으며, 기쁘게 십자가를 지고자 했기에 즐겁게 순교할 수 있었다.

'희망의 신학자'로 널리 알려진 위르겐 몰트만은 이렇게 말했다.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바로 그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희망과 기쁨의 태양이 떠올랐다."

이처럼 우리 순교자들 역시 그들의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부활의 희망을 보았다.


사랑

우리 선조 순교자들은 사랑의 덕을 닦는 영성생활의 모범과 표양을 제시했다. 향주삼덕 가운데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하느님을 온몸과 온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규범은 신앙인에게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지상 명령이다. 게다가 나와 같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된 인간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 역시 중요한 계명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생각해 볼 것은 인간을 사랑하되 도대체 얼마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구약 성경에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계명, 그러니까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듯이 타인도 사랑하면 된다는 계명이 주어졌기에 어느 정도 사랑해야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54-35)

다시 말해서 신약 시대를 사는 신앙인은 이제 타인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정도를 넘어서 예수님꼐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만큼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 이는 얼마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 그 기준이 참으로 놀랍게 바뀐 것이다.

그래서 독일의 저명한 윤리 신학자인 베른하르트 헤링은 사랑에 관해 논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에 관해 첫째로 이야기한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을 수용하며, 희망을 통해 그분께 의지하고 그분께로 나아간다. 그러나 사랑을 통해야 참으로 그분을 따르는 제자요, 벗이 된다. 사랑이 없는 신자는 그분의 참된 제자도 아니고 참된 신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신앙의 비밀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타인을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이 신약 성경이 일러주는 사랑의 표준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처하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이러한 수준의 사랑이 요구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55)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어떤 사람에게는 하느님 체험이 환상에 불과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현실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순교자들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구체적인 현실로 체험하였다. 서로가 사랑 안에 머물면서 그 사랑으로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순교를 할 수 있었다.

우리 인간은 서로 사랑하며 사는 존재다. 또 사랑을 믿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소설가 신경숙이 쓴 <엄마를 부탁해>라는 작품 첫 장에는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본디 리스트의 <사랑의 꿈>이라는 연주곡에 나오는 멋진 말이다. 이를 우리 신앙인의 눈으로 본다면 이렇게 바꿔서 말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한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사랑이 아니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사랑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우리 순교자들이 박해를 받던 시대에는 탐관오리들의 착취가 심했으며, 흉년도 자주 들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박해를 피해 숨은 교우들은 그러한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형편이 어려울수록 서로 돕고 위로하며 격려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에 심한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는데도 교우촌에 사는 신앙인들은 오히려 그런 이가 적었다. 박해 시대 신앙 공동체는 이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고난의 시간을 이겨 냈던 것이다.

또한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혹독하게 고문을 받을 때도 그들은 다른 교우들의 이름을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고문은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까지 몰고 가 결국 자백을 받아 내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순교자들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처럼 서로를 그리스도의 지체로 여겨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다른 신앙인을 배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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