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실천하는 삶으로

자발적이며 헌신적인 교회 공동체

박해 시대에 성사 생활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 선조들의 신앙은 성사를 받으려는 열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직자들의 공소 순방 소식을 들으면 신자들은 가족을 이끌고서, 아무리 먼 곳일지라도, 어떠한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그곳을 찾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신자들과 성직자들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맞이할 수 있었다. 깊은 산골에 숨어 살던 교우촌 신자들이 성사를 받기 위해 하루에 백여 리를 걷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순교자의 후손인 우리들은 주일 미사 뺴먹은 죄와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를 고해한 뒤, 다른 죄는 없다고 고백하면서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회개 없는 삶에는 영성도 없다. 우리 선조들은 교우촌에서 아침 · 저녁 기도를 함께 모여 바치면서 성령의 은총을 청했다. 비록 성직자를 만나기 어려웠고 성사에 참여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자발적이고 헌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여 교우촌이 성령 안에 있는 공동체임을 하루하루 확인했다.
브라질의 대표적 해방 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는 '성령의 성사로서의 교회'를 기초 공동체'와 접목시켰다. 해방 신학에서 '기초 공동체'란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에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실천적 범주로, 제도 교회가 가장 낮은 차원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하는 모습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가난한 교회' 자체가 되고자 하는 복음 공동체를 뜻한다. 보프는 이 기초 공동체에서 성령의 성사인 교회가 구체적으로 완성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교회는 "자발성과 창의성이 그토록 활발하게 꽃피고 이웃을 자애롭고 정성스럽게 돌보는 모성적 태도가 피어나는 곳'이며, "모든 생명과 구원의 영성적 원리의 원천인 성령"이 살아 움직이는 카리스마 공동체다.
시대와 역사 그리고 문화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한국 초대 교회의 공동체를 지탱하던 신앙생활에도 보프가 말하는 성령의 성사로서의 교회를 이루는 자발성과 헌신성이 있었다. 그들은 하루 세 번 바치는 삼종 기도 떄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저희 가운데 계시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며 주님과 함께 사는 일상을 성찰했다. 삼종 기도를 바치던 순교자들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의미를 깊이 성찰하면서 강생의 영성을 일상생활에서 구현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꺠닫고 하느님의 거룩한 신비와 본성에 참여하는 사람 모두가 한 형제자매라고 가르치셨다. 우리 선조 순교자들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들은 바를 실행에  옮기는 이들이 바로 내 어머니고 형제자매임을 확인하였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임을 확인해 주신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어떠한 처지에 있더라도 모두 소중하고 거룩하다.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에 초대 교회 공동체는 혈육 관계를 뛰어 넘어,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형제애 속에서 살 수 있었다.
인간이 아닌 돈이 우선시되며 물질적 부가 모든 가치보다 우선시되는 오늘날,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 것이다. 즉, 인간의 거룩함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강생의 영성을 회복하는 일이며, 구체적으로는 오늘날 우리가 미사 전례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야만 하는 이유이자 내용이다. 기도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준다. 우리 선조 순교자들은 아침 기도, 저녁 기도, 삼종 기도와 묵주 기도 등을 마치 수도자들처럼 규칙적으로 바치는 기도의 삶을 살았다.








실천이 없는 믿음

물론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것만이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아니다. 따라서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것은 믿음의 척도를 가르는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흔히 '쉬는 교우'라든지 '냉담 교우'라고 일컫는 이들 가운데에는 주일과 평일을 가르는 이중적 신앙에 실망을 느낀 이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인도의 성자로 알려진 간디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와 닮지 않았기 떄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간디의 말은 참으로 아픈 지적이지만 그리 틀린 것만도 아니다. 주일 미사 때마다 사도신경을 바치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삶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면서도, 미사 후에는 믿지 않는 이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야고보 사도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고 했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4.26)
이러한 야고보 사도의 지적은 '무늬만 신자'인 이들의 모순을 강하게 두들긴다. 사랑의 근원을 식별했을 때, 세례를 받고 매주 성체를 영하며 성당 일에 결코 빠지지 않는 소위 '열심히 활동하는 신자들'도 사실은 악인일 수 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처럼 "성사를 모시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실이 악하여 사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믿음을 통해서만 그형상을 얻는다."
이 말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유일한 길은 사랑의 실천뿐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남기신 새 계명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것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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